도마복음? 친엄마 찾아 삼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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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주일 박원일 목사님의 설교 '도마 이야기 - 다시 읽기 (04/16/2023)'와 목사님께서 과거에 몇 차례 하셨던 '도마복음' 관련 설교들을 듣고 또한 '기독교 용어정리' 중 '영지주의' 편을 읽고 한 주간 제가 생각한 것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예전에 해외 입양인들의 친부모를 찾는 여정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매우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이 그들이 친부모를 찾고자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열망이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본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즉,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자 하는 영혼의 깊은 갈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나를 알고자하는 우리의 본능이 바로 우리의 영성이자 이러한 열망이 동서양의 모든 종교를 낳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서른 살 되던 해, 어느 날, 갑자기 벼락치듯 '내가 도대체 누구지?'라는 뜬금 없는 의문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혼란과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그리고 십년 후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구토증세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 갓 태어난 딸아이를 두고 죽을 수도 있다는 슬픔보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채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중년의 위기를 겪습니다. 이혼을 하기도 하고, 각종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우울증을 앓기도 하고,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기도 하고, 사업 실패를 겪기도 하고, 자식을 잃기도 하고,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기도 하고, 믿았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삶 전체가 흔들리는 이 대혼란에 대해 칼 융은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 진짜 당신이 되라는 신호다'라고 놀라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평온했던 삶에 쓰나미처럼 엄습한 이 끔찍한 혼란과 위기가 사실은 우리 영혼의 오랜 잠을 깨우는 신의 알람이자 삶의 관심을 바깥 세상에서 자신의 내부로 돌려 진짜 자기를 만나러 오라는 신의 초대장인 것입니다.
입양인들처럼 우리의 영혼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입양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양부모를 만나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해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질세계의 매혹적이거나 혹은 고통스런 환영들이 우리의 모든 관심을 사로잡아 결국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의 진짜부모가 누구인지, 우리의 진짜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든 기억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의 근본적 주제는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의 해결'이 아닌 '망각이라는 한계상황의 해결'이자 '진짜 나의 발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지주의 복음서로부터 얻는 가장 큰 교훈은 우리 안에 신성이 내재한다는 깨달음이다. 스스로 신성을 모시고 있기에, 그것에 눈을 돌리라는 가르침이다. (중략) 이 점에서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참 인간, 참 신적 존재가 되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예수의 역할은 우리 안에 참 빛, 신적 씨앗이 숨겨져 있다고 깨우치는 일이다. 따라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깨달음이 필요하다. 깨달은 자는 예수와 같고(도마, 13절), 은유적 표현으로 예수의 '쌍둥이'형제다(1절). 빌립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신비한 지식(gnosis)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크리스천이 아니고, 그리스도이다."' ('기독교 용어정리',319쪽에서 발췌)
이상은 박원일 목사님께서 알기 쉽게 정리해주신 영지주의 복음의 실체입니다. 우리 안에 신성이 내재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이 놀라운 가르침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도래했음을 깨달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의 목표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한 지식, 그노시스를 개인적으로 체험하여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아를 초월하는 영적 체험을 통해 예수님처럼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도마복음 13절에 의하면 베드로와 마태는 각각 예수를 엘리야나 이사야 같은 의로운 예언자 혹은 디오게네스와 같은 견유학파의 철학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예수에 관한 이해도 제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 많은 주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현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반면 도마는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깨달은 예수가 누구신지 견줄 인간의 언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도마에게 자신을 더 이상 '스승'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으니 하산을 명하신 것입니다.
도마복음 13절의 예수님과 도마의 대화는 '염화미소'라는 고사성어를 떠오르게 합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군중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연꽃 한 송이를 높이 드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그 누구도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오직 제자 마하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아무 말 없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부처님께서는 만족하시고 '나의 법은 마하 가섭에게 전하노라'라는 말로 화답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도마복음 13절은 기독교 버전의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립문자'란 진리는 문자나 언어가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된다, 문자나 언어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일 뿐이니 문자나 언어에 얽매이지 말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외별전'은 경전과는 별도로, 문자와 언어를 초월해 비밀리에 전해진 진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지자불언, 언자불지' 즉,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또한 윌리엄 제임스가 그의 책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신비체험을 통해 깨달은 진짜 앎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라고 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를 깨우친 사람들, 자신 안의 신성을 발견한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그것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도 비유가 아니면 가르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설명해 주셨듯이 요한복음은 도마복음과는 매우 다르게 도마를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20장 24절 이하를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면 도마는 예수의 제자 중 가장 믿음이 없는, 그래서 예수에게 질책을 받는 가장 열등한 제자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이미 20장 20절에 예수께서는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신의 몸에 남은 십자가형의 흔적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도마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를 부여하십니다. 이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천국열쇠 수여식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반면 도마는 예수의 몸에 난 상처들을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스승의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가 예수님에게 쿠사리를 얻어먹고 다른 제자들은 다 받은 '금테 두른 사도 라이센스'도 못받습니다. 다시말해 도마는 파문을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의 행간을 읽으면 이 사건의 의미가 너무나도 명확해 집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너무나도 탁월한 인물이었기에, 다른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 예수의 그노시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를 시기질투한 다른 제자들에의해 믿음 없는 한심한 제자로 가공되어 조리돌림을 당하고 사도 카르텔에서 추방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특히 20장 24절 이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도마는 믿음 없는 제자가 될 수도 있고 가장 탁월한 제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다른 제자들과 도마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고 주장하는 어떤 존재의 말을 그냥 믿었습니다. 반면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목격담과 신앙고백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그의 상처를 만져보겠다고 심지어는 그 구멍 안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삽입해 보겠다는 매우 담대한 결심을 합니다. 도마는 자신이 직접 구하고, 찾고, 두드려 보는 구도자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보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도마는 자신의 결심과 소망대로 부활하신 예수를 눈으로 본 정도가 아니라 그의 상처 안으로 들어가, 그의 존재 안으로 들어가 몸과 몸이 그리고 영혼과 영혼이 하나로 결합되는, 하느님이신 예수와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냅니다. 도마는 이러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후 예수께 '나의 주, 나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를 통해 마침내 도마는 그노시스를 얻었고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후예들은 '주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예수를 타자화하며 경배의 대상으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그의 후예들은 예수와 연합되는 개인적인 신비체험을 통해 예수께서 성육신한 하느님이시며 자신들도 성육신한 하느님이라는 깨달음을, 신성한 그노시스를 얻었습니다.
다시말해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권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진정 누구신지, 그의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특정 교리로 살아있는 예수를 박제로 만들어 교회에 유폐시켜 버렸습니다. 다행히 도마로 대표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신비체험을 통해 예수는 성육신의 보편성에 대한 비유이자 상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즉, 소위 주류 크리스찬들은 예수만을 성육신한 하느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었고, 반면 자칭 정통파에게서 이단으로 낙인 찍힌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성육신한 하느님의 아들딸이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몽학선생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은, 도마복음은 주류 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예수처럼 핍박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지만 마침내 이천년만에 부활해 오늘날 진짜 예수의 복음을 알고자 하는 이들의 몽학선생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945년 나그 함마디 영지주의 문서들의 발견이야말로 진정 예수의 부활이자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신 역사적 대사건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도달합니다. 이천년전 예수와 도마의 위대한 깨달음이, 그러한 신비한 영적체험이 현대 과학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재현 가능한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그노시스를 얻을 수 없다면, 특정인만 이것이 가능하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신성이 우리 안에 이미 도래했고 내재되어 있다는 복음'이 '예수 믿으면 살아서는 복 받고 죽어서는 천당간다'는 복음과 무엇이 다를까?
기독교 성립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즉, 침례를 통해, 고행을 통해, 환각 식물을 통해, 특별한 호흡법을 통해, 임사체험을 통해, 샤먼의식을 통해, 명상을 통해 자신 안에 내재된 우주만물의 참된 도를, 신성을 발견했고 지금도 발견하고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어떤 지역에서는 이러한 자기 발견이 장려되기도하고 존중받았지만 어떤 시기와 어떤 지역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로 이러한 시도들이 정죄당하고 금지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교회의 가르침과 통제를 벗어나 자기가 직접 하느님과의 연합을 시도하거나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마녀로 몰려 고문 당하고, 파문 당하고,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지금은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어떤 기독교인이 개인적으로 그러한 구도자적 삶을 산다고 해서, 그러한 신비 체험을 추구한다고 해서 교회 당국에 체포되거나 고문 당하거나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철저한 이중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그는 결국 교회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으로, 개혁교리를 모르는 혹은 왜곡하는 무서운 이단으로 낙인찍혀 왕따를 당하거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든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가 우주의 전부라고 믿는 현대사회에서 신비체험을 통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처럼 가족들이나 지인들에 의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심하면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체험을, 자신의 변화된 인생관과 삶에 대해 함부로 타인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뒤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 모른다." (마태 7: 6)
마지막으로 사족을 덧붙이자면 저는 교회에서, 주일 설교에서, 목사님을 통해, 도마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듣게 될 줄은, 또한 이런 설교를 사랑하는 분들을 만나게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박원일 목사님의 도마복음 관련 설교를 듣는 내내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전율과 희열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또한 '귀명창이 좋은 소리꾼을 낳는다'는 말이,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https://youtu.be/OLVw_9ABmu0
예전에 해외 입양인들의 친부모를 찾는 여정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매우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이 그들이 친부모를 찾고자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열망이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본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즉,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자 하는 영혼의 깊은 갈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나를 알고자하는 우리의 본능이 바로 우리의 영성이자 이러한 열망이 동서양의 모든 종교를 낳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서른 살 되던 해, 어느 날, 갑자기 벼락치듯 '내가 도대체 누구지?'라는 뜬금 없는 의문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혼란과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그리고 십년 후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구토증세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러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 갓 태어난 딸아이를 두고 죽을 수도 있다는 슬픔보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한 채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중년의 위기를 겪습니다. 이혼을 하기도 하고, 각종 중독에 빠지기도 하고, 우울증을 앓기도 하고,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기도 하고, 사업 실패를 겪기도 하고, 자식을 잃기도 하고,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기도 하고, 믿았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삶 전체가 흔들리는 이 대혼란에 대해 칼 융은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 진짜 당신이 되라는 신호다'라고 놀라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평온했던 삶에 쓰나미처럼 엄습한 이 끔찍한 혼란과 위기가 사실은 우리 영혼의 오랜 잠을 깨우는 신의 알람이자 삶의 관심을 바깥 세상에서 자신의 내부로 돌려 진짜 자기를 만나러 오라는 신의 초대장인 것입니다.
입양인들처럼 우리의 영혼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입양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양부모를 만나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해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질세계의 매혹적이거나 혹은 고통스런 환영들이 우리의 모든 관심을 사로잡아 결국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의 진짜부모가 누구인지, 우리의 진짜 정체성이 무엇인지 모든 기억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의 근본적 주제는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의 해결'이 아닌 '망각이라는 한계상황의 해결'이자 '진짜 나의 발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지주의 복음서로부터 얻는 가장 큰 교훈은 우리 안에 신성이 내재한다는 깨달음이다. 스스로 신성을 모시고 있기에, 그것에 눈을 돌리라는 가르침이다. (중략) 이 점에서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참 인간, 참 신적 존재가 되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예수의 역할은 우리 안에 참 빛, 신적 씨앗이 숨겨져 있다고 깨우치는 일이다. 따라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깨달음이 필요하다. 깨달은 자는 예수와 같고(도마, 13절), 은유적 표현으로 예수의 '쌍둥이'형제다(1절). 빌립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신비한 지식(gnosis)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크리스천이 아니고, 그리스도이다."' ('기독교 용어정리',319쪽에서 발췌)
이상은 박원일 목사님께서 알기 쉽게 정리해주신 영지주의 복음의 실체입니다. 우리 안에 신성이 내재한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이 놀라운 가르침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도래했음을 깨달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의 목표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한 지식, 그노시스를 개인적으로 체험하여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아를 초월하는 영적 체험을 통해 예수님처럼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도마복음 13절에 의하면 베드로와 마태는 각각 예수를 엘리야나 이사야 같은 의로운 예언자 혹은 디오게네스와 같은 견유학파의 철학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예수에 관한 이해도 제자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수 많은 주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현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반면 도마는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깨달은 예수가 누구신지 견줄 인간의 언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도마에게 자신을 더 이상 '스승'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으니 하산을 명하신 것입니다.
도마복음 13절의 예수님과 도마의 대화는 '염화미소'라는 고사성어를 떠오르게 합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군중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연꽃 한 송이를 높이 드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그 누구도 그 뜻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오직 제자 마하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아무 말 없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를 본 부처님께서는 만족하시고 '나의 법은 마하 가섭에게 전하노라'라는 말로 화답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도마복음 13절은 기독교 버전의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립문자'란 진리는 문자나 언어가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된다, 문자나 언어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일 뿐이니 문자나 언어에 얽매이지 말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외별전'은 경전과는 별도로, 문자와 언어를 초월해 비밀리에 전해진 진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지자불언, 언자불지' 즉,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또한 윌리엄 제임스가 그의 책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신비체험을 통해 깨달은 진짜 앎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라고 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를 깨우친 사람들, 자신 안의 신성을 발견한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그것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도 비유가 아니면 가르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설명해 주셨듯이 요한복음은 도마복음과는 매우 다르게 도마를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20장 24절 이하를 우리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면 도마는 예수의 제자 중 가장 믿음이 없는, 그래서 예수에게 질책을 받는 가장 열등한 제자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이미 20장 20절에 예수께서는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신의 몸에 남은 십자가형의 흔적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도마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를 부여하십니다. 이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천국열쇠 수여식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반면 도마는 예수의 몸에 난 상처들을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기 전까지는 스승의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가 예수님에게 쿠사리를 얻어먹고 다른 제자들은 다 받은 '금테 두른 사도 라이센스'도 못받습니다. 다시말해 도마는 파문을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의 행간을 읽으면 이 사건의 의미가 너무나도 명확해 집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너무나도 탁월한 인물이었기에, 다른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 예수의 그노시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를 시기질투한 다른 제자들에의해 믿음 없는 한심한 제자로 가공되어 조리돌림을 당하고 사도 카르텔에서 추방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특히 20장 24절 이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도마는 믿음 없는 제자가 될 수도 있고 가장 탁월한 제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다른 제자들과 도마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고 주장하는 어떤 존재의 말을 그냥 믿었습니다. 반면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목격담과 신앙고백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그의 상처를 만져보겠다고 심지어는 그 구멍 안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삽입해 보겠다는 매우 담대한 결심을 합니다. 도마는 자신이 직접 구하고, 찾고, 두드려 보는 구도자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보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도마는 자신의 결심과 소망대로 부활하신 예수를 눈으로 본 정도가 아니라 그의 상처 안으로 들어가, 그의 존재 안으로 들어가 몸과 몸이 그리고 영혼과 영혼이 하나로 결합되는, 하느님이신 예수와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어냅니다. 도마는 이러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후 예수께 '나의 주, 나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를 통해 마침내 도마는 그노시스를 얻었고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그의 후예들은 '주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예수를 타자화하며 경배의 대상으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도마는, 그의 후예들은 예수와 연합되는 개인적인 신비체험을 통해 예수께서 성육신한 하느님이시며 자신들도 성육신한 하느님이라는 깨달음을, 신성한 그노시스를 얻었습니다.
다시말해 베드로로 대표되는 교권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진정 누구신지, 그의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한 채 특정 교리로 살아있는 예수를 박제로 만들어 교회에 유폐시켜 버렸습니다. 다행히 도마로 대표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신비체험을 통해 예수는 성육신의 보편성에 대한 비유이자 상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즉, 소위 주류 크리스찬들은 예수만을 성육신한 하느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로 믿었고, 반면 자칭 정통파에게서 이단으로 낙인 찍힌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뿐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성육신한 하느님의 아들딸이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는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몽학선생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은, 도마복음은 주류 기독교 지도자들로부터 예수처럼 핍박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지만 마침내 이천년만에 부활해 오늘날 진짜 예수의 복음을 알고자 하는 이들의 몽학선생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945년 나그 함마디 영지주의 문서들의 발견이야말로 진정 예수의 부활이자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신 역사적 대사건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도달합니다. 이천년전 예수와 도마의 위대한 깨달음이, 그러한 신비한 영적체험이 현대 과학문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재현 가능한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가 그노시스를 얻을 수 없다면, 특정인만 이것이 가능하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신성이 우리 안에 이미 도래했고 내재되어 있다는 복음'이 '예수 믿으면 살아서는 복 받고 죽어서는 천당간다'는 복음과 무엇이 다를까?
기독교 성립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즉, 침례를 통해, 고행을 통해, 환각 식물을 통해, 특별한 호흡법을 통해, 임사체험을 통해, 샤먼의식을 통해, 명상을 통해 자신 안에 내재된 우주만물의 참된 도를, 신성을 발견했고 지금도 발견하고 있습니다. 어떤 시기에는, 어떤 지역에서는 이러한 자기 발견이 장려되기도하고 존중받았지만 어떤 시기와 어떤 지역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로 이러한 시도들이 정죄당하고 금지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교회의 가르침과 통제를 벗어나 자기가 직접 하느님과의 연합을 시도하거나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마녀로 몰려 고문 당하고, 파문 당하고,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지금은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어떤 기독교인이 개인적으로 그러한 구도자적 삶을 산다고 해서, 그러한 신비 체험을 추구한다고 해서 교회 당국에 체포되거나 고문 당하거나 잔혹하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철저한 이중생활을 하지 않는 이상 그는 결국 교회에서 이상한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사람으로, 개혁교리를 모르는 혹은 왜곡하는 무서운 이단으로 낙인찍혀 왕따를 당하거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든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가 우주의 전부라고 믿는 현대사회에서 신비체험을 통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처럼 가족들이나 지인들에 의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심하면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체험을, 자신의 변화된 인생관과 삶에 대해 함부로 타인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뒤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 모른다." (마태 7: 6)
마지막으로 사족을 덧붙이자면 저는 교회에서, 주일 설교에서, 목사님을 통해, 도마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듣게 될 줄은, 또한 이런 설교를 사랑하는 분들을 만나게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박원일 목사님의 도마복음 관련 설교를 듣는 내내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전율과 희열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또한 '귀명창이 좋은 소리꾼을 낳는다'는 말이,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https://youtu.be/OLVw_9ABmu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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