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누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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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가 새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받았던 깊은 인상 중의 하나가 설교 리뷰 모임이었습니다. 설교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시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용기를 내어 지난 종려주일 브랜든 존슨 목사님의 설교 'Who is This? (04/02/2023)'를 듣고 제가 한 주간 묵상하며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매우 거친 생각이 담긴 글이니 여러분의 넓고 깊은 혜량 부탁드립니다.
Who is this? 군중들의 환호성 속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을 보며 누군가가 던진 이 질문은 이천여년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예수,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요? 누가 과연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우리의 형제자매를, 우리의 배우자를, 우리의 자녀를 온전히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잘 모르지 않나요? 그런데 더군다나 아득한 이천년전 머나먼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았다는 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인 남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도대체 무슨 수로 알 수 있을까요?
사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을 향해 어떤 사람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는 한낱 목수 아닌가?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의 형제자매들이 우리랑 함께 살고 있잖아!'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는 미쳤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가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혀 있다'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는 먹보에 술꾼이고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주는 메시아시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저 분은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예요'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네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냐?'라고 물었고, 어떤 사람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분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셨다!'고 말했습니다.
Who is this? 하지만 솔직히 지금 누가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할까요? 그는 이제 새롭지 않습니다. 이미 유행이 지난 듯 합니다. 세상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 관심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를 아주 당연히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로 추앙합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정 그가 누구였는지,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전한 복음이 정녕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고민할 뿐입니다.
저에게 있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관한 다른 사람의 해석이나 신앙고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예수가 누구였는지를 밝혀가는, 우리 안에 이미 임했다는 하느님 나라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수동적 믿음이 아닌 도전이자 탐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치열한 구도자의 삶을 통해 마침내 자기 안에 임한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를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우리 안에 있다는 하느님 나라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구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도의 길에서 오직 하나의 얼굴이 아닌 천의 얼굴을 가진 다양한 예수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예수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예수에 대한 특정 교리는 예수를 영원히 알 수 없게 만들 뿐입니다. 특정 개인이나 특정 공동체가 예수에 대한 이해를 독점하는 순간 그 예수는 온전한 예수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욕망을 예수에게 투영하는 순간 예수는 그의 전지전능한 우상이자 무기력한 희생양이 되어버립니다. 이천년여년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예수를 향해 올리브 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은 얼마 못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악을 써댑니다. 결국 예수를 메시아로, 다윗의 자손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만든 것도 군중들이었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로마제국의 아들에게 넘겨 잔혹하게 죽인 것도 군중들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지금 수 많은 한국교회는 그런 군중들의 교회입니다. 그들은 진짜 예수가 누구였는지, 예수가 전한 하느님 나라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군중심리에 사로잡혀 예수를 미친듯이 소비할 뿐입니다. 흥분한 군중들의 함성에 예수를 향한 소수의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광기로 예수를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로 경배하고, 동시에 예수를 철저히 짓밟고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우상숭배이며 종교적 정신분열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천년전이나 오늘이나 초라한 나귀를 타고 그런 종교적, 정치적 광기를 내뿜는 군중들 사이를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통과하고 계십니다. 그는 왜 하필 나귀를 타셨을까요? 과연 스가랴의 예언대로 그는 겸손한 왕이셔서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신 걸까요? 저는 예수께서 말이 아닌 나귀를, 특별히 새끼 딸린 암나귀를 선택하신 중요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는 민수기 22장의 나귀를 탄 발람을 생각나게 합니다. 발람을 태운 나귀는 주인은 보지 못하는 불칼을 들고 있는 하느님의 천사를 발견하더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 나귀는 발람이 아무리 재촉하고 때려도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자기 주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나귀가 에덴 동산의 그 뱀처럼 말까지 합니다. 너도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어린 인간을 계몽하는 뱀과 영안이 열리지 않은 어리석은 주인과 논쟁을 벌이는 나귀를 보며 저도 저희 가족이 키우고 있는 3살짜리 멍멍이 '똘이'를 함부로 하대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고보니 실제로 나귀는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는 고집이 쎈 동물이라고 합니다. 말은 주인의 어떠한 명령에도 복종해 심지어 주인과 함께 절벽에서도 뛰어내리지만 나귀는 위험을 감지하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정도로 영리하고 주관이 뚜렷하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말이 아닌 나귀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어떤 설교를 하더라도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맹신하고, 목사의 명령이라면 진짜로 똥도 먹는 사람들은 민수기 22장을 읽고 말이 아닌 나귀를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마냥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양떼가 아니라 자기 앞길을 분별할 줄 아는 나귀와 같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예수께서 숫나귀가 아닌 새끼 딸린 암나귀를 타고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사건을 스가랴의 예언의 성취가 아닌 다른 의미와 상징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예수의 진정한 친구였고, 누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누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와 함께 고난과 죽음의 그 길을 갔던 동반자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남자제자들이 아니라 바로 막달라 마리아로 대표되는 이름 없는 갈릴리의 여인들과 아이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공동체 안에서 사람 취급 못받던 여인들과 아이들이야말로 각종 죄인들과 함께 예수의 진정한 친구였고 하느님 나라 운동의 동반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며 그의 복음을 통해 자기들 안에, 자기들 사이에 임한 하느님 나라를 맛보았습니다. 여자들은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남자들의 소유물이었던 세상에서 예수께서는 여인들을, 심지어는 유대인들이 이방인 노예보다도 못하게 생각했던 사마리아 여인마저도 당신의 제자로 삼아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파케 하셨습니다. 그들은 때가 되자 예수를 태운 어미 나귀처럼 예수와 함께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십자가를 진 예수를 따라 골고다 언덕을 향해 묵묵히 나아갔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고 십자가형을 언도받자 베드로를 비롯한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 제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예수 곁을 지켰고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께서 죽음의 땅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생명의 땅 갈릴리로 가셨다'는 제 2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어찌된 일인지 이들의 흔적은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약속이나 한 듯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예수의 진짜 제자들의 행적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만약 여자들도 복음서를 썼다면, 혹은 이들이 쓴 복음서가 나중에라도 발견된다면 우리는 남자들이 만든 사복음서가 그리고 있는 예수와는 또 다른 예수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저는 기대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남성 우월주의와 서구 중심의 신학에서 벗어나 여성적인 것, 모성적인 것, 동양적인 것, 부드러운 것, 유연한 것, 내밀한 것, 연약한 것, 신비한 것, 아름다운 것을 되찾지 않으면 결국 또 하나의 컬트집단으로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Who is this? 예수, 그가 누구신지 그 답을 찾아 우리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임한 '하느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통치하신다는 그 영원한 나라'를 찾아 우리는 각자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누가 대신 가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위험하고 외로운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구도자의 길이 예수께서 먼저 가신 길이며 또한 예수를 따르겠다는 우리가 반드시 가야만하는 길입니다.
Who am I? 그런데 예수를 알고자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하느님 나라 복음을 깨닫고자하는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답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께서 체험하신 사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며 죽음을 상징하는 물 속에서 일시적인 죽음을 통해 궁극적인 존재와 조우하는 강력한 신비체험을 경험하십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하며 동시에 그 궁극의 존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십니다.
물 밖으로 나온 예수는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 놀라운 신비체험을 통해 자신의 그림자인 사탄의 유혹을 통과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광야라는 절대고독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의 소명과 운명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예수는 과거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 공동체 밖을 방황하는 소위 죄인들의 고통과 필요에 민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죄인들과 여인들과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하느님 나라가 이들 안에 이미 임했다는 놀랍고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혼란에 빠진 사람에게 평안을 주고, 평안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혼란을 준다'라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의 삶과 그의 복음은 죄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주었지만 의인들에게는 엄청난 혼란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런 예수를 그의 가족들은 미쳤다고 잡으러 다녔고, 고향 일가친척들은 이런 예수를 벼랑 끝으로 몰아 죽이려 했습니다.
저는 로마군에 의해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 보다 고향 사람들에게 이끌려 벼랑 끝에 내몰리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가 더 큰 아픔과 슬픔을 느낍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누군가가 자기 고향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물며 추방 정도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함께 먹고 마시며 희노애락을 함께 한 일가친척들에게 직접 살해 위협을 당한다는 것은 로마군의 십자가 처형보다 더 극심한 충격과 고통과 수치심을 주는 잔혹한 처벌방식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더 놀랍고 충격적인 것은 이때 예수님의 모친이나 형제들이 예수님을 보호하려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있어 예수님의 고난의 상징은 골고다의 십자가가 아니라 고향 나사렛에서의 이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후에 산헤드린 공의회의 선동으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을 언도 받기 이전에 이미 이때 고향땅 일가친척들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으신 셈입니다. 아마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의 당신의 삶이 얼마남지 않으셨음을 직감하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언처럼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남자 제자들을 다 도망가게 만든 이 거북하고 불편한 제안은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가능하려면 가족이 원하는 나, 사회가 원하는 나, 교회가 원하는 나가 아닌 진짜 원래의 나를 찾으려는 영적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갈망이 있다면, 그 갈망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면 마침내 그 길 끝에서 영원한 생명 즉 하느님과 분리되지 않은, 분리될 수 없는 참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Who is this? 예수는 누구일까요? Who am I? 나는 누구일까요? Who are we? 우리는 누구일까요? 이 세 가지 질문의 공통된 답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재의 나, 상식적인 나, 당위의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 영원하신 하느님과 하나된 원래의 나를 되찾는 것이 구원이며, 그러한 상태가 하느님 나라이며, 그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 자신이 곧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리스도가 되어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도 그리스도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구도적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자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https://youtu.be/Pc51UCO3mdI
Who is this? 군중들의 환호성 속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을 보며 누군가가 던진 이 질문은 이천여년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예수,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요? 누가 과연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우리의 형제자매를, 우리의 배우자를, 우리의 자녀를 온전히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잘 모르지 않나요? 그런데 더군다나 아득한 이천년전 머나먼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았다는 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인 남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도대체 무슨 수로 알 수 있을까요?
사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을 향해 어떤 사람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그는 한낱 목수 아닌가? 마리아의 아들이고 그의 형제자매들이 우리랑 함께 살고 있잖아!'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는 미쳤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가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혀 있다'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그는 먹보에 술꾼이고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주는 메시아시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저 분은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예요'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네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냐?'라고 물었고, 어떤 사람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분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셨다!'고 말했습니다.
Who is this? 하지만 솔직히 지금 누가 예수님에 대해 궁금해 할까요? 그는 이제 새롭지 않습니다. 이미 유행이 지난 듯 합니다. 세상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 관심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를 아주 당연히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로 추앙합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정 그가 누구였는지,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전한 복음이 정녕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고민할 뿐입니다.
저에게 있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관한 다른 사람의 해석이나 신앙고백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예수가 누구였는지를 밝혀가는, 우리 안에 이미 임했다는 하느님 나라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수동적 믿음이 아닌 도전이자 탐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치열한 구도자의 삶을 통해 마침내 자기 안에 임한 하느님 나라를 발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를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우리 안에 있다는 하느님 나라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구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도의 길에서 오직 하나의 얼굴이 아닌 천의 얼굴을 가진 다양한 예수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예수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예수에 대한 특정 교리는 예수를 영원히 알 수 없게 만들 뿐입니다. 특정 개인이나 특정 공동체가 예수에 대한 이해를 독점하는 순간 그 예수는 온전한 예수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욕망을 예수에게 투영하는 순간 예수는 그의 전지전능한 우상이자 무기력한 희생양이 되어버립니다. 이천년여년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예수를 향해 올리브 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은 얼마 못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악을 써댑니다. 결국 예수를 메시아로, 다윗의 자손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만든 것도 군중들이었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로마제국의 아들에게 넘겨 잔혹하게 죽인 것도 군중들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지금 수 많은 한국교회는 그런 군중들의 교회입니다. 그들은 진짜 예수가 누구였는지, 예수가 전한 하느님 나라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군중심리에 사로잡혀 예수를 미친듯이 소비할 뿐입니다. 흥분한 군중들의 함성에 예수를 향한 소수의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과 광기로 예수를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로 경배하고, 동시에 예수를 철저히 짓밟고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우상숭배이며 종교적 정신분열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천년전이나 오늘이나 초라한 나귀를 타고 그런 종교적, 정치적 광기를 내뿜는 군중들 사이를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통과하고 계십니다. 그는 왜 하필 나귀를 타셨을까요? 과연 스가랴의 예언대로 그는 겸손한 왕이셔서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신 걸까요? 저는 예수께서 말이 아닌 나귀를, 특별히 새끼 딸린 암나귀를 선택하신 중요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는 민수기 22장의 나귀를 탄 발람을 생각나게 합니다. 발람을 태운 나귀는 주인은 보지 못하는 불칼을 들고 있는 하느님의 천사를 발견하더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 나귀는 발람이 아무리 재촉하고 때려도 말을 듣지 않아 결국 자기 주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나귀가 에덴 동산의 그 뱀처럼 말까지 합니다. 너도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어린 인간을 계몽하는 뱀과 영안이 열리지 않은 어리석은 주인과 논쟁을 벌이는 나귀를 보며 저도 저희 가족이 키우고 있는 3살짜리 멍멍이 '똘이'를 함부로 하대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알고보니 실제로 나귀는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지 않는 고집이 쎈 동물이라고 합니다. 말은 주인의 어떠한 명령에도 복종해 심지어 주인과 함께 절벽에서도 뛰어내리지만 나귀는 위험을 감지하면 주인의 명령을 거부할 정도로 영리하고 주관이 뚜렷하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말이 아닌 나귀를 선택하셨다는 것은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어떤 설교를 하더라도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맹신하고, 목사의 명령이라면 진짜로 똥도 먹는 사람들은 민수기 22장을 읽고 말이 아닌 나귀를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기독교인들은 마냥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양떼가 아니라 자기 앞길을 분별할 줄 아는 나귀와 같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예수께서 숫나귀가 아닌 새끼 딸린 암나귀를 타고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 사건을 스가랴의 예언의 성취가 아닌 다른 의미와 상징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누가 예수의 진정한 친구였고, 누가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누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와 함께 고난과 죽음의 그 길을 갔던 동반자는 베드로로 대표되는 남자제자들이 아니라 바로 막달라 마리아로 대표되는 이름 없는 갈릴리의 여인들과 아이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공동체 안에서 사람 취급 못받던 여인들과 아이들이야말로 각종 죄인들과 함께 예수의 진정한 친구였고 하느님 나라 운동의 동반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먹고 마시며 그의 복음을 통해 자기들 안에, 자기들 사이에 임한 하느님 나라를 맛보았습니다. 여자들은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남자들의 소유물이었던 세상에서 예수께서는 여인들을, 심지어는 유대인들이 이방인 노예보다도 못하게 생각했던 사마리아 여인마저도 당신의 제자로 삼아 하느님 나라 복음을 전파케 하셨습니다. 그들은 때가 되자 예수를 태운 어미 나귀처럼 예수와 함께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성으로, 십자가를 진 예수를 따라 골고다 언덕을 향해 묵묵히 나아갔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고 십자가형을 언도받자 베드로를 비롯한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 제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예수 곁을 지켰고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께서 죽음의 땅 예루살렘을 떠나 다시 생명의 땅 갈릴리로 가셨다'는 제 2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어찌된 일인지 이들의 흔적은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약속이나 한 듯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예수의 진짜 제자들의 행적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만약 여자들도 복음서를 썼다면, 혹은 이들이 쓴 복음서가 나중에라도 발견된다면 우리는 남자들이 만든 사복음서가 그리고 있는 예수와는 또 다른 예수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 저는 기대합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남성 우월주의와 서구 중심의 신학에서 벗어나 여성적인 것, 모성적인 것, 동양적인 것, 부드러운 것, 유연한 것, 내밀한 것, 연약한 것, 신비한 것, 아름다운 것을 되찾지 않으면 결국 또 하나의 컬트집단으로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Who is this? 예수, 그가 누구신지 그 답을 찾아 우리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임한 '하느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통치하신다는 그 영원한 나라'를 찾아 우리는 각자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그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누가 대신 가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위험하고 외로운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구도자의 길이 예수께서 먼저 가신 길이며 또한 예수를 따르겠다는 우리가 반드시 가야만하는 길입니다.
Who am I? 그런데 예수를 알고자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하느님 나라 복음을 깨닫고자하는 나는 과연 누구일까요?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답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께서 체험하신 사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서 침례를 받으시며 죽음을 상징하는 물 속에서 일시적인 죽음을 통해 궁극적인 존재와 조우하는 강력한 신비체험을 경험하십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하며 동시에 그 궁극의 존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체험하십니다.
물 밖으로 나온 예수는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 놀라운 신비체험을 통해 자신의 그림자인 사탄의 유혹을 통과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광야라는 절대고독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의 소명과 운명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예수는 과거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 공동체 밖을 방황하는 소위 죄인들의 고통과 필요에 민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죄인들과 여인들과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하느님 나라가 이들 안에 이미 임했다는 놀랍고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혼란에 빠진 사람에게 평안을 주고, 평안을 누리는 사람에게는 혼란을 준다'라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의 삶과 그의 복음은 죄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주었지만 의인들에게는 엄청난 혼란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런 예수를 그의 가족들은 미쳤다고 잡으러 다녔고, 고향 일가친척들은 이런 예수를 벼랑 끝으로 몰아 죽이려 했습니다.
저는 로마군에 의해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 보다 고향 사람들에게 이끌려 벼랑 끝에 내몰리신 예수님을 묵상할 때가 더 큰 아픔과 슬픔을 느낍니다. 고대사회에서는 누군가가 자기 고향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물며 추방 정도가 아니라 어릴 적부터 함께 먹고 마시며 희노애락을 함께 한 일가친척들에게 직접 살해 위협을 당한다는 것은 로마군의 십자가 처형보다 더 극심한 충격과 고통과 수치심을 주는 잔혹한 처벌방식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더 놀랍고 충격적인 것은 이때 예수님의 모친이나 형제들이 예수님을 보호하려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있어 예수님의 고난의 상징은 골고다의 십자가가 아니라 고향 나사렛에서의 이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후에 산헤드린 공의회의 선동으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을 언도 받기 이전에 이미 이때 고향땅 일가친척들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으신 셈입니다. 아마 이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의 당신의 삶이 얼마남지 않으셨음을 직감하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유언처럼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남자 제자들을 다 도망가게 만든 이 거북하고 불편한 제안은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저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 가능하려면 가족이 원하는 나, 사회가 원하는 나, 교회가 원하는 나가 아닌 진짜 원래의 나를 찾으려는 영적 갈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그런 갈망이 있다면, 그 갈망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면 마침내 그 길 끝에서 영원한 생명 즉 하느님과 분리되지 않은, 분리될 수 없는 참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Who is this? 예수는 누구일까요? Who am I? 나는 누구일까요? Who are we? 우리는 누구일까요? 이 세 가지 질문의 공통된 답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재의 나, 상식적인 나, 당위의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통해 영원하신 하느님과 하나된 원래의 나를 되찾는 것이 구원이며, 그러한 상태가 하느님 나라이며, 그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 자신이 곧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리스도가 되어 예수님처럼 다른 이들도 그리스도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구도적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자 우리 기독교인의 삶의 목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https://youtu.be/Pc51UCO3m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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