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집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최현숙·김진호·이나미 3인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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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향신문 (바로가기)
해원(解寃). 가슴속에 맺힌 원통함을 푸는 일. 태극기 집회에 참여했다 돌아가는 노인들의 표정을 보자니 떠오른 단어다. 혼자 혹은 삼삼오오 와서 “대통령을 지키자. 빨갱이를 몰아내자”고 외치던 사람들은 광장의 거대한 태극기 물결을 확인하고 한 톤 더 밝아지고 후련해진 표정으로 돌아간다. 개인으로 존재하다 사회를 발견하고 가는 것은 촛불시민들뿐만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사회’는 정상적인 우리 사회와는 분리된 무언가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태극기 집회와 참여자들의 행태는 탐구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원(寃)은 사회 안에서 형성된다. 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집단이 이런 원통함을 공유한다면, ‘태극기 노인’의 울분이 형성된 역사적 과정이야말로 적폐 청산을 위해 들여다봐야 할 대상이다.
<주간경향>은 태극기 집회의 의미와 노인세대 참여자의 심리를 들여다보기 위해 대담을 진행했다. 진보정당에서 오래 활동을 해왔고 현재 독거노인생활관리사이자 구술기록자로 70대 남성 노인의 생애구술사를 다룬 <할배의 탄생> 저자 최현숙씨(60), 한국의 보수정치 철학 연구자 이나미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53), 한국 개신교 연구자인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55)이 함께했다. 대담은 3월 16일 오후 경향신문사에서 약 3시간가량 진행됐다. 대담자들은 “태극기 집회는 밀려난 사람들의 인정투쟁”이라며 “집회의 조직자와 참여자를 분리하고, 동정과 혐오 이분법을 넘어서 사안을 볼 것”을 주문했다.
최현숙 구술기록자·독거노인생활관리사(왼쪽),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가운데), 이나미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오른쪽)이 3월 16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태극기 집회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태극기 집회를 취재해 본 기자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일당 받고 나오는 사람들? 돈만으로는 절대로 저런 열정이 나올 수 없다.’ 1950년대 이전 출생한 세대의 일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필사적으로 막아서기 위해 거리 행동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현숙(이하 최) 태극기 집회에 일부러 참석했다. 노인들이 저렇게 열정적으로 모이도록 하는 것은 박탈감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계기가 됐지만 근본적으로는 박탈감에 의한 인정투쟁이다. 자신들의 경험, 가치관, 신념이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현대사회의 속도와 변화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멈출 수는 없으니 뒤로 가는 것을 원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박탈당했다는 것인가. 또한 박탈과 소외가 왜 하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매개로 광장으로 분출된 것일까.
최 태극기 집회 참여자들은 자신들을 세조에 맞서 단종을 지키려 한 ‘사육신’이나 ‘의병’에 비유하면서 존재를 항변한다.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가 아니라 그 이전의 왕정시대로까지 퇴행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서울에서 노인들이 대표적으로 모이는 곳은 종로3가의 파고다공원과 종묘공원이었다. 종묘공원은 조선 역대 왕조의 위패가 있는 공간이다. 파고다공원은 시민의 공원으로 만든다며 이들을 쫓아냈고, 종묘공원은 성역화 사업을 한다며 또 쫓아냈다.(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07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진행해 화단과 펜스를 설치했다. 사회자 주)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노동자를 몰아낸 방식과도 같다. 종묘공원에서조차 노인들을 쫓아낸 것은 상징적이다. 쫓겨난 사람들이 종묘공원 커다란 나무 밑에서 놀이 삼아 한 자신들의 정치연설과 토론을 현재 광장에서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최현숙 “태극기 집회의 청중과 마이크 잡은 사람들을 분리해야 한다” / 이상훈 선임기자김진호(이하 김) 개신교 내부의 변화도 지금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인세대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닌데, 보수 개신교인들의 집회는 크게 네 가지 부류가 있다. 첫 번째 부류는 1990년대 서울 강남·분당 등에서 성공한 대형교회 목사들이 동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명박 정권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잘 동원이 안 된다. 지금 교회에서 장로 등을 맡는 부유하고 교육받은 40~50대는 성조기가 등장하고 목사가 동원하는 형태의 집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좀 더 세련된 방식을 원한다. 두 번째는 목사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1960~70년대 경기 외곽에 기도원이 많이 들어섰는데, 주로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의 신자들이 모여 ‘메시아니즘’(구원자 숭배)에 가까운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지하철이나 시내에서 막무가내로 전도하는 사람들은 이 부류가 많다. 역시 목사들이나 중산층 개신교인들은 이들을 싫어한다. 기도원들은 1990년대 거의 몰락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대형교회가 시민단체에 자금을 대서 조직하는 청년·탈북자 집회다. 태극기 집회 참여자들은 두 번째 유형의 신앙행태와 매우 유사하다. 개신교뿐 아니라 천주교, 불교 등 한국의 메이저 종교들은 계층이동을 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1970년대 크게 성장한 이유는 가난하고 건강하지 못한 계층에 ‘하나님 믿으면 부자 되고, 건강해지고, 영적으로 편안해진다’며 포용한 결과다. 지금은 이런 가난한 신자들은 교회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고 떠돌다 열정을 쏟아낼 기회가 되면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나미(이하 이)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전쟁의 기억의 영향력이 크다. 내가 20대일 때도 당시 30대들과 말이 잘 안 통했다. 그들은 젊었을 때부터 보수적이었다. 저희 부모님도 70세가 넘으셨는데, 아버지의 경우 인민군이 전쟁 중 (군량미 명목으로) 쌀 낱알을 세면서 가져간 것을 아직도 기억하며 치를 떨고 있다. 물론 쌀 낱알을 가져간 건 인민군뿐만은 아닐 수 있다. 예전에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시골의 노인들을 인터뷰했다. 실제로는 한국군이나 미군에 의한 학살이 많았지만, 극단적 공포는 자신을 지배자와 동일시하도록 만든다. 위에서 말하는 대로 ‘모두 공산당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도 한 태극기 집회 참여자로부터 “우리가 돈 때문에 여기 나오는 거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지금도 정말 정권이 바뀌면 북한이랑 친해지고 우리나라가 공산화될 것이라는 공포를 갖고 있다.
김 노인세대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전쟁을 겪고 극우 반공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에 자아가 형성됐다. 이는 세월이 흘러도 잘 안 바뀐다. 1946년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문헌을 보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구분이 명확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후 남한이나 북한이나 잿더미 상태에서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카리스마적인 리더가 전쟁의 기억을 조장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미움만 허용됐다. ‘국가가 허용한 기억’만 남는 것처럼 분노의 표출방식 역시 ‘국가가 허용한 형태’로만 남는다. 2000년대 초 몇몇 노인들이 저를 찾아온 적이 있다. 자식과의 갈등이 너무 심하다고 했다. 그런데 자식에 대한 분노를 민주정권에 대한 분노로 표현했다. 자식에 대한 분노는 자신들이 나고 자라면서 강요받은 ‘가족주의’와 맞지 않는 것이다. 분노는 오직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만 허용됐고, 세대 간이나 가족 간 갈등을 해결하는 완충장치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좌우대결처럼 보이는 갈등은 사실 좌우대결이 아니라 다른 맥락일 수 있다.
최 태극기 집회에서는 자기들끼리도 수틀리면 서로 ‘빨갱이’라고 욕한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면 그냥 ‘빨갱이’라고 부른 것을 몸이 기억하게 된 것이다.
이 감정적인 문제는 크다. 2012년 대선후보 토론회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후보가 논리적이고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나이 든 세대는 ‘저런 싸가지 없는 자식 같은’이라고 생각했다. 또 독일 나치나 트럼프 지지현상에서 보이듯 극우는 강력한 지도자를 열망하는 심성이 있다. 극우가 보수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아까 ‘사육신’ 얘기가 나왔는데, 박정희 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사실상 군주제였다.(대담을 진행한 날 박 전 대통령 사저에서는 “마마님 죄송합니다”라며 절을 올리는 지지자도 있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강력한 군주는 너무 익숙하다.
최 역시 분단이 원죄적인 측면이 있다. 박근혜는 하나의 계기였고, 전쟁 이전부터 시작된 권력자를 따르고 약자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도록 한 역사, 노인의 박탈감 등등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다.
김 분노는 임계점에 달했는데, 사회적으로 치유하는 방법이 없다. 민주화 이후, 특히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와 만성적인 저성장 시대를 거치며 사람들의 불안이 가속화되고, 심리적인 위로·안정·영적인 것을 찾으려는 흐름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종교계에서는 ‘뉴웨이브’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런 ‘영적인 위로’는 다 소비를 통해 이뤄진다. 가난한 노인들은 소비를 통한 위로에 동참할 수 없다. 과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모이던 가난한 교인들의 경우 타악기 등으로 감정을 고조시키다 통곡하고, 그때 카리스마적 목사가 나와서 병자들을 치유한다. 무질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치유를 한다. 보건의료체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유일하게 아는 치유의 방식인데, 지금은 그런 공간이 없다.
이나미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전쟁의 기억의 영향력이 크다” / 이상훈 선임기자보수정권이 집권해도 노인의 박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노인 빈곤문제 등은 계속 진행됐다. 그들의 박탈감과 분노는 보수정권을 향하지 않는다. ‘태극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는다.
이 순종을 내면화했던 세대다. 극우 집회가 극렬했던 때는 2003~2004년 무렵이었다. 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가 탄생하자 ‘정말 야권이 안 되길 바랐던 마음’이 격렬한 분노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전쟁이 벌어졌고, 4·19 이후 5·16으로 좌절됐다. 이후 긴 독재기간에 광주민주항쟁까지 겪었다. 계속 패배의 역사였다. 반면 이후 세대는 승리와 상승의 경험이 많다. 87년 민주항쟁의 승리, 직선제 경험, 88올림픽, 월드컵 4강, 심지어 2008년 촛불집회에서도 당시 정부는 한 발 물러섰다. 세대 간 경험이 완전히 다르다.
최 노인들은 거꾸로 기억한다. 젊은이들이 ‘패배의 역사’로 기억하는 시대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인고의 시대’였다. 기초연금 20만원을 준다고 했다가 안 준다 했을 때 대다수 노인 반응이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청년들도 일자리 없다는데, 어떻게 우리만 달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봐야 할 요소로, 이 분들의 생애사에서 국가는 항상 불안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예 없었고, 그 후에는 매일 좌우대립하다 전쟁하다 분단됐다. 보수의 경제정책이나 양극화를 비판하지만, 평생 가진 거 없었던 노인들은 그나마 기본적인 복지체계가 깔린 지금이 최선의 상태다. 남한에 남은 그들에게 이런 국가라도 잘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태극기 집회에 대한 질문을 달리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중과 마이크 잡은 사람들을 분리해야 한다. 그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태극기를 들었다? 청중들은 지킬 기득권이 아예 없다. 똑같이 계엄령을 말하더라도 그들이 광장에서 울면서 말하는 것은 정말 국가가 불안하다고 믿은 것이다. 일단 그 마음을 알아줘야 한다. 반대로 마이크 권력을 쥔 사람들이 무대에서 이런 발언을 할 때는 확실하게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이 사망이나 과격시위의 책임을 개개인들에게 돌릴 것이 아니고 뒤에서 활용하는 거대 장이 있다. 서북청년단 역시 김성수(<동아일보> 설립자)와 한민당 세력이 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야당집회에 가서 때려부수게 했다. 서청 입장에서는 폭력행위를 통해 미군물자를 얻을 수 있었다.
김 동의한다. 거리 전도사들 대부분이 남자 노인들이고 공통의 경험은 자식과의 불화다. 그런 분노를 젊은 여성에게 시비 걸고, 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으로 해소한다. 그것과 별개로 이런 소외를 증오로 엮는 증오의 선동가들을 경계해야 한다. 서북청년단 역시 월남한 청년의 분노를 누군가 선동해 살인자로 만든 것이다. 우리 사회에 그런 매개자들이 많다. 교회도 그 중 하나다.
노인세대의 울분과 박탈감은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무언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현대사회의 상식에 맞지 않는 요구까지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알고 보면 태극기 나온 분들도 착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해결이 될까. 대화는 가능할까.
이 KBS 방송에서 본 것인데, 북한 이슈와 관련해 정확한 정보를 주고 토론을 시키면 때때로 토론은 난상으로 난리가 나도 결국 의견합일을 보고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기도 했다. 희망적인 신호였다.
김진호 “분노는 임계점에 달했는데, 사회적으로 치유하는 방법이 없다” / 이상훈 선임기자최 노인세대에게 이것이 가능할까 좀 회의적이다. 이 분들은 논리로 따라오지 않는다.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다른 방식 중 하나가 ‘생애사’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나, 어떤 경로를 거쳐 정치적으로 보수화됐나, 왜 가난했을까 묻고 또 물어보며 현재 상태에 이르게 된 사회적 경로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예전(2008년) 총선 때 서울 종로에서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 골목에서 명함 주고 설명하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선거는 시끄러운 것이고 자기 찍을 사람은 정해져 있다. 고무 다라이에 꽃 심고 상추 심는 게 낙이다. 거기 가서 ‘그 꽃이름 뭐예요? 상추 언제 심었어요?’라고 접근해야 한다. 마음을 열면 속내를 이야기한다. 정치 지향이 다른 거 알아도 ‘강정(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그거 어떻게 생각해?’ 물어본다. 노인은, 아니 모든 사람은 그렇게 움직인다. 복지정책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다. 노인들은 골목 안에서 공동체 문화로 사는 데 습관이 된 데다, 생존을 위해서 알아서 잘 찾아 다닌다. 못 나가고 집에 있는 건 무릎이 안 좋기 때문이다. 노인들 하는 말이 “무릎과 틀니만 괜찮으면 산다”고 한다. 폐지 줍는 노인들은 “이걸로 몇천원 벌어서 다 쓸 데가 있는 거야” 하면서 열심히 줍는다. 동정할 필요 없다. 젊은이들은 독거노인을 보면 ‘내가 저런 비참한 독거노인이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고, 언론도 그렇게 접근하지만, 독거노인은 독거가 젤 편하다.
김 사회적 돌봄 시스템은 확장돼야 한다. 내가 만나는 경우 절대고독 상태의 노인들이 많다. 특히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남성 노인들이 그렇다.
최 물론 잘 나가다가 추락한 남성 노인의 경우 복지체계에 편입되지 않았고, 자살과 고독사의 핵심이므로 개선돼야 한다. 또한 노인들은 서로 싫어한다. 무릎이 아파서 매일 TV만 보는 사람들에게 TV는 ‘고령화가 문제다. 노인이 많아서 문제’라고 하니까. 그런데 평생 가난했던 노인이나 여성 노인의 경우는 스스로 복지시스템에 편입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할배의 탄생>에 쓰여진 월남 참전용사 출신 할아버지는 선거에서 박정희(1960~70년대)와 김대중(1997년)을 찍었다. 박정희는 남자다워서 좋고, 김대중은 그의 탄압에 굴하지 않아 찍었다는 것이다. 다들 자기 기준이 있다. 동정이건 혐오건 ‘노인들은 다 똑같다’고 보는 시선이 대화의 가장 큰 장벽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에 대한 동정과 시혜적 시선에 반대한다. 그걸 뒤집으면 혐오다.
이 우리 사회는 노인을 사회의 군더더기로 본다. 반면 실질적으로는 1:9 또는 2:8의 여론을 반영하는 태극기집회와 촛불집회를 최소 반반의 지분을 차지하는 ‘세대갈등’인 것처럼 보도해 탄핵국면에서 나오는 경제민주화·재분배 등의 요구를 방어하는 데 활용한다.
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여론이 15%다. 집회 규모를 보면 이 정도 인구에서 엄청 많이 나온 거다. 무시무시한 결집도다. 더구나 노인인구는 늘어난다. 지금이야 탄핵국면이니 ‘수구정당 안 되겠지’라고 하다 언제 뒤집어질지 모른다. 이런 게 반복되면 엄기호 선생 말대로 ‘일상의 울증과 광장의 조증’도 반복된다. 일상적으로 전혀 문제 해결이 안 되다가 일 터지면 광장에서 폭발하는 것이다. 노인하고 대화해야 하는 이유다.
김 두 분의 말씀에 동의한다. 더불어 ‘증오의 선동가들을 어떻게 솎아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노인들이 가진 속성을 나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인뿐 아니라 청년, 탈북자 등 여러 계층이 이들의 표적이 된다. 저는 NGO에 대한 투명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어떻게 활동하고, 국가든 교회든 이들을 어떻게 지원하는가 이런 것들이 상시적으로 투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사회·정리 |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사진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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