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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묵상하는 '공의의 십일조'(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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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강조하면서 온갖 부패엔 침묵
크리스마스에 묵상하는 '공의의 십일조'
2011년 12월 21일 (수) 13:56:32 [조회수 : 2573]김응교 (  메일보내기 )

교회에서 '서리 집사' 서약서를 보내 왔어요. 거기엔 "1. 주일을 거룩히 지키며, 2. 십일조를 드리며"에 두껍게 강조하고 밑줄이 쳐져 있었어요. 자격 없는 서생에게 고마운 일이죠. 주일을 당연히 거룩히 지켜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사실 일요일이 끝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 모든 날이 주일이지요. 십일조 내는 것도 당연합니다. 다만 십일조에 대해서 지금 다니는 교회 목사님과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일본에서 다니던 교회에는 십일조를 내다가 귀국해서 저는 매주 헌금과 적은 건축헌금 외에,  십일조는 다른 곳에 직접 내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십일조를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 실험해보라"(말라기3:8)를 인용하면서, 십일조 해야 복 받는다고 자주 설교하는데, 정확한 설교일까요?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재정이 충분해야 하고, 충분한 재정이 있어야 일할 수 있는 것도 이해하지만, 이러한 설교가 성경적인지 생각해 봅니다. 
 

  
 
 ▲ 이만열 교수님의 명함 뒷면입니다. 
 
첫째, 여기서 복이란 어떤 복인지요?

1981년이었을 거예요. 컴퓨터가 없던 시대에 성경에 나오는 '복(福, Blessing)'이라는 단어를 노트에 매일 옮겨 적어본 적이 있어요. 대학노트로 몇 권이 나오더군요. 스무살 때 제가 깨달았던 결론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복에 일관성도 있지만 분명한 차이도 있으며, 신약성서의 복은 당시 유명했던 고(故) 신현균, 강달희 같은 부흥사들이 말하는 복과 달랐다는 것이에요. 고등학교 3학년 때 거의 매주 갔던 여의도 순복음교회 금요철야기도회와 오산리 기도원은 이 노트 정리로 작별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는 마치 교인들이 십일조를 안 내면 복을 못 받을 듯 설교합니다. 그런 복이라면  부자나라 일본이나 세계 제2의 경제대국 중국은 십일조 잘 내서 부자 나라입니까? 제가 13년 동안 살다온 일본은 십일조 잘 내서 사회복지가 잘 된 부자 나라일까요? 아닙니다.

구약시대의 복은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창세기3:12)이 되듯, 오래 살고, 모래알처럼 아들딸 많고,  관직 얻는 것이지만, 예수시대 이후 복은 장수나 다산(多産)보다는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달려갈 길 다 달려가 죽을 자리에 가서 정확히 죽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돌 맞아 죽은 스데반이 복 받은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의에 주린 자는 복되다" 했고, 윤동주는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처럼"(「십자가」)이라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행복하다"고 표현했지요. 진리를 위해 살다가 톱으로 잘리고 매 맞아 죽은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선조들은  십일조 안 내서 저주 받았을까요?
 
둘째, 말라기서는 백성'만'을 대상으로 쓴 편지인지요? 말라기서는 백성에게'만' 한 말이 아닙니다. 백성은 물론이고 오히려 부패한 당시 제사장들이 말라기서의 청자였습니다. 부패한 제사장들에게 하는 책망이었죠. 말라기서를 1장부터 자세하게 읽었다면, 말라기서의 청자는 백성보다 제사장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러운 떡을 드리며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말라기1:6)
"It is you, O priests, who despise my name"(Malachi1:6)

 
예언자 말라기가 왜 제사장들을 여러번 호명했을까요? 제사장들이 흠 있는 희생을 드려 레위언약을 스스로 깨뜨리고, 잡혼(雜婚)과 이혼을 반복하자 "야웨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는가"(2:1∼16)라고 지적합니다. 이 지적에 “우리가 어떻게 야웨를 괴롭혔나이까?”(2:17∼18)라며 도전하는 반성 없는 사회였습니다. 요즘 한기총을 생각하게 하죠. 말라기가 지적한 제사장들은 십일조를 엉뚱한 곳에 쓰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판이 된 성전을 뒤엎었던 사건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분노한 예언자 말라기가 썼던 편지를 읽어야 했던 대상자는 부패한 제사장들이었죠. 그렇다면 말라기서를 소개할 때 '교회가 십일조를 제대로 쓰고 있는지'를 교인들에게 설교해야 상식적인 논리겠죠. 말라기서가 말하는 십일조론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겁니다. 만약 말라기서의 내용을 제대로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계속 설교한다면 문제는 심각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바울이 "십일조를 내야 복받는다"고 말씀하신 구절이 있는지요? 없습니다. 오히려,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눅11:42)라며 공의를 행하지 않고 십일조를 정확히 내는 이들을 예수님은 책망하십니다.

구약의 십일조론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2000년 이전 성전에서 소 잡고 양 잡고 각 뜨고 불사르던 그 모든 것을, 하나라도 빼지 말고 다 지켜야 합니다. 성경의 일점일획도 지켜야 한다고 믿는 문자주의자들은 지금 당장 아파트에서 나와 광야나 사막에 가서 텐트 치고 사셔야 합니다. 성막 짓고 예배드리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폐하셨던 율법 중에서 십일조 조항만 빼서 "십일조를 지켜야 복을 받는다"고 설교하는 것은 그래서 어불성설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자면 이렇게 설교해야 합니다.

"여러분, 십일조를 잘 낸다고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와 함께 공의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저는 '정의와 자비를 위한 십일조'를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대통령과 정부의 온갖 부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지적하지 못하는, 참된 예언자가 사라진 교회일수록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외에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언급하시거나, 십일조를 내야 복받는다고 하신 구절은 전혀 없습니다. 바울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고후 8:3)라고 했지, 십일조를 강조한 구절은 없습니다. 공간을 빌려서 월세를 내가며 예수공동체를 이루어본 저는 물론 이해합니다. 십일조가 없으면 월세 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유아부터 청년부의 교육을 위해서, 목회자 가족을 위해서, 서구에서는 이제 거의 지키지 않지만, 우리 한국 교회는 임원인 집사 이상은 십일조를 내자고 하는 편이 솔직한 말입니다.  
 
저는 십일조를 반대하지 않아요.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십일조 제도를 강조해온 한국교회 전통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십일조 이상으로 십이조, 십오조도 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기부는 한계가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삭개오에게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재산을 나누라 하셨던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현 정권의 부자감세는 비성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민중들'만' 함께 하셨다는 일부 민중신학자의 생각은 틀립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부자들도 있었습니다. 단, 예수님은 부자들에게 "재산을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최근 안철수씨처럼 주식의 반을 내놓은 십의 오조는 놀라운 행위지만, 그 전에 구조적으로 부자감세가 철회되어야죠. 안타까운 일은 십일조를 강조하는 목사일수록, 현 정권의 부자감세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한마디 안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삭개오에게 했듯이 부자에게 "나누세요"라고 했듯, "부자감세는 틀립니다"라고 설교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예수님 말씀처럼 그 돈이 어디에 쓰이냐, 공의롭게 살면서 십일조를 내는가가 문제겠죠. 그런데 진정 낮은 곳을 많은 교회들이 외면해오지  않았는지요? 오히려 권력에 빌붙어 부패한 정권을 응원해 왔지요. 그러한 교회를 많은 국민들은 싫어하며 '개독교'라고 하는 겁니다. 금권에 빌붙는 교회의 치부가 이 정권 아래 고스란히 드러났죠.
 
아우슈비츠에서 150만을 죽였던 아이히만 중령은 착한 아버지였습니다. 악역을 맡는 착한 사람이 더 악을 많이 범하는 것을 한나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 했죠. 국민의 눈물과 죽음에 신경쓰지 않는 '관료적 성실성'이야말로 가장 악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의 눈물을 외면하는 '열성적 신앙'이 오히려 사회악의 구조를 다 강고히 구축시키는 역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매주 헌금과 많지 않은 건축헌금 외에 저는 십일조는 다른 곳에 보내왔습니다. 5명이 냉동고에 안치된 용산철거민, 16명이 자살한 쌍용(숫자가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과 한중해직자 가족 모임, 반값등록금 문제로 14명이 자살한 대학학생회, 병 걸린 작가 등에 보내왔습니다. 거기에 눈물의 예배가 있고 예수님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내 몸도, 내 가족도, 두세 사람이 모인 곳(마태18:20)이 교회입니다. 용산철거민 사건 때 목요일마다 개신교 예배가 있었는데, 저는 그때 정말 눈물 흘리며 낮은 곳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느꼈습니다. '3억 짜리 차를 타고 다니는 곽선희 목사'(MBC에 보도됐었죠)  같은 이가 설교하는 교회인 척하는 대형건물에 십일조, 아니 단돈 천 원 헌금 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십일조를 낸다 해도 말씀대로 살지 않고, 그 돈을 의롭게 쓰지 않는다면 오히려 책망 받을 겁니다. 

“너희는 베델로 몰려가서 죄를 지어라. 길갈로 들어가서 더욱더 죄를 지어라.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쳐 보아라. 또 누룩 넣은 빵을 감사 제물로 불살라 바치고, 큰소리로 알리면서 자원예물을 드려 보아라. 이스라엘 자손아, 바로 이런 것들이 너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아모스 4:4-5)
 

  
 
 ▲ 사진은 작년 2010년 여름, 용산 철거민 사건이 있었던 남일당 골목에서 목요일마다 있었던 개신교 예배를 마치고 행진할 때입니다. 가장 왼쪽은 제가 존경하는 선배 김거성 목사님이고, 중앙은 싱가폴 국회위원이셨는데, 잠깐 모셨습니다. 우연히 어떤 카페에서 발견해서 퍼왔습니다. 
 
적지 않은 목사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종북 좌익"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80년대 창문이 막혀 있던 방에서, 형사는 정부를 비판하던 20대의 저에게 "자생간첩"이라고 했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을 부정한 적이 없었고, 김일성을 찬양한 적도 없었습니다. 다만 당시 군사정부를 비판하면 그것 자체가 북한을 이롭게 하는 국가보안법이라며, 따라서 자생간첩이라며 형사가 윽박질렀습니다. 지금도 민주화를 원하는 이들에게 "종북좌파"라며 올가미를 씌우고 있는 어용신문들이 쓰는 표현이 나열되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겨우 딱지가 앉았던 상채기가 벗겨지며 피가 흐릅니다. 종북이니 좌파니  비판하는 목사들의 공통점은 북한을 비판하면서 북한의 욕망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세습'을 합니다. 김동호 목사님이 쓰셨죠.

"우리 한국 교회에는 담임목사의 아들이 아니면 그 어떤 사람에게도 맡길 수 없는 큰 교회가 많다. 몇 년 전부터 유행을 하더니 이제는 평범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는 점점 북한을 닮아간다. 북한을 닮아 몰락해 가고 있다. 하나님이 이사야 6장에서 말씀해 주신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가 되리라는 말씀을 이 아침에도 생각하고 붙잡는다." (김동호)

그들은 자신들의 세습과 부패를 사이비 민족주의로 상쇄시키려 하지요. 종북좌파를 들먹이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고문 받을 때처럼 끔찍합니다. 그런 말 쓰는 목사는 목사로 안 보이고, 민주인사들 고문하던 형사로 보입니다. 저는 사실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예수파입니다만,  이런 목사들은 '부패우파'를 절대로 비판하지 않아요. 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BBK대표 전과 십사범을 대통령으로 지지했던 과오를 절대로 반성하지 않지요.

내가 사랑해서 선택한 아내가 그 교회 권사로 있어, 아내 곁에 앉아 예배 드리는 시간이 행복해서, 아내의 선택도 존중하고 싶고, 아이들이 친구가 있어서, 매주 그 교회에 가지만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설교를 아내 곁에서 들어야 하는 비루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눈물 흘리거나, 눈 감아버리고 잊는 겁니다.  

아내와 두 아들과 제가 십일조를 즐겁게 내면서 봉사할 교회를  주변에 찾아봐도 없어 괴롭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공학을 지향하고, 여당을 비판하면 종북좌파라고 합니다. 감자탕교회, 산울교회(http://sanul.or.kr/), 들꽃향린교회, 나들목교회, 청파감리교회 등 그저 진리와 의를 위해 애쓰는 교회가 많이 부럽습니다. 그런 교회 뒷좌석에 몰래 앉아 사랑하는 아내와 떨어져 예배드리는 기분은 많이 슬픕니다.   
 
매년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립니다. 교인들은 칸타타 등 온갖 발표회에 많은 시간과 기금을 투자합니다. 칸타타 등 성가발표를 하면서도 고등부 회장이었을 때 저는 우리도 구유에 가보자며, 쌀을 모아 백설기 떡을 만들어, 비닐에 카드와 백설기 떡 한 덩이와 귤을 넣어 청소부에게 드렸습니다. 물론 구조 변혁 없는 단발성에 끝나는 자기만족적인 행위라서 금방 후회했었죠.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쿄에서 교회 일 할 때, 교인들과 과일과 떡을 비닐에 넣어 홈리스를 찾아다니며 전했습니다.
 
두 아들이 성탄을 축하하며 발표회 하는 것이 즐거워 저도 사진 찍곤 합니다. 크리스마스, 정말 기쁜 날이죠. 이 세상에 가장 낮은 구유로 찾아와서, 평생 가난한 사람들과 벗하다가, 부활해서 가장 먼저 궁핍한 갈릴리로 가겠다고 하신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셨으니, 그렇지만, 우리만 만족하는, 교회 안에서만 만족하는 헤롯의 기득권에 안주하는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겠다는 다짐의 날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12제자들은 누구에게 십일조 했을까요?
예수님을 못박으라 했던 제사장들에게 십일조 내는 것이 복음일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누가 제사장들입니까?(벧전 2:5-9, 계 5:10, 1:16)
 
교회 헌금을 전도사들 몇몇에게 나누어 몇백만 원씩 한나라당 선거운동비용으로 보낸 뉴라이트 목사 기사가 선거법위반으로 보도되었는데, 증거도 있지만 처벌 없이 무혐의로 금방 사라졌죠. 제가 다녔던 한때 감신대 대학원 본관 입구에 오른쪽 벽에 총장님들 얼굴상이 벽에 있었습니다. 일제 시대 말기 그중에 몇 명은 헌금과 십일조를 모아 일본군에게 비행기를 봉헌한 사람이 있습니다. 교인들과 상의 없이 여당 선거비용으로 헌금을 쓰고, 군국주의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이런 곳에 십일조 내야 복 받는지요? 이런 곳이 예배당인지요, 골빈당인지요? 교인들이 깨어있지 않는 한, 며칠 전 신문에 났던 이 같은 삯군목사들은 헌금과 십일조를 유용할 것입니다.  
 
이쯤에서 이 글 맨 위에 있는 사진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저 사진은 제가 존경하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님 사진입니다. 교회 장로님이시죠. 작년에 이만열 교수님을 뵈었는데 주신 명함 뒤에 '제가 돕는 기관입니다'라며 깨알처럼 저렇게 도와야 할 곳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의 귀중한 돈을 보내야 할 곳이 저렇게 많습니다.

30대 중반에 교회 장로가 되었다가, 독재에 야합하는 교회들을 보고 장로를 철회하고, 평생 평신도로 지내신 은사 박두진 시인이 자주 생각납니다. 사모님은 대신감리교회 권사님이시죠. 이 땅의 교회들이 전부 타락한 것이 아니며, 많지 않은 헌금을 최대한 절약하여 쓰리라 저는 믿습니다. 제가 가본 감자탕 교회는 교인이 몇천 명이 넘을 텐데 세든 상가 건물에서 예배드리며, 헌금의 반 이상을 외부 구제비로 쓰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는 어떤지요? 건축비 주차장 확장비, 내부 경조비가 대부분 아닌지요? 교회는 커지고, 교인은 빚 얻어서 헌금하는 교회, 저는 그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젠 좀 더 낮은 곳으로, 교회 밖의 보이지 않는 교회로, 부동산 구입하기 보다는 교육과 낮은 자를 위해 헌금이 쓰이면 교인들도 신이 나서 말하지 않아도 십일조를 할 것입니다.   
 
저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공의의 십일조를 내는 삶을 살고 있는가'하는 자책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저는 관념이 아니라 인격으로 믿습니다. 이것을 신앙이라 하면 그렇다 할 수 있고, 만남이라 하면 그렇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분이 찾아가셨던 가장 낮고 천한 말구유가 있는 곳은 매일이 크리스마스이고, 바로 그 낮은 곳에 십일조를 보내려고 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김응교 / 시인, 숙명여대 교수


출처: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734 
* '리얼리스트100(http://j.mp/sVOAWq)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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