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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씨 때문에 많이들 힘들어 합니다. 저희 둘째가 6학년인데 어느 날 보니까 동무들과 ‘이명박 놀이’를 하더군요. 한 아이가 이명박 술래가 되어서 다들 그 친구를 놀리고 괴롭히는 놀이. 하여튼 이명박 싫어하는 사람 이명박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니 바로 우리에게 이명박은 우리 삶의 외부에서 침략한 악한, 다스베이더 같은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건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지요. 이명박은 다스베이더도 쿠테타를 통해 집권한 군인대통령도 아닌,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그것도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대통령입니다.
대체 이명박은 왜 대통령에 당선이 된 걸까요? 이명박이 존경할 만한 정치인이라거나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학자들 말대로 한국인들이 보수화 우경화해서? 여러 분석들이 있지만 저는 한국인들이 대통령을 뽑는 가치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라 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대통령을 뽑는 게 아니라 사장을 뽑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명박을 뽑은 이유는 그가 대한민국이라는 주식회사를 잘 운영할 사람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최선의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줄 사장 말입니다. 이명박 스스로 말하듯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 말입니다.
무엇이 한국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신자유주의 자본화’의 결과입니다. 군사파시즘 시절에 지배계급이 인민을 지배하는 방식은 온갖 권위주의적인 방법들이었죠. 권위적으로 억누르고 말 안 들으면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고. 지배계급 입장에서 보자면 그게 가장 편하고 효율적인 지배방식이죠. 그런데 이른바 민주화가 된 후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죠. 민주화 이후 지배방식은 지배계급의 가치관을 인민에게 심어주어, 즉 자본의 가치관과 욕망을 심어주어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되면 그런 풍요가 잘사는 것이고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만 심어주면, 굳이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지 않아도 스스로 복종하는 겁니다.
제가 무슨 대단한 금욕주의자라도 된 양, 잘 살고 행복하게 사는 게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당연히 잘 살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 그런 삶을 추구하는 법이지요. 문제는 잘 살고 행복하게 살고 할 때 그 '잘'과 '행복'의 기준이 뭔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자본화가 진행되면서 바로 그 기준이 변해버렸습니다. 돈으로 말입니다. 이명박의 당선은 그런 변화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명박 씨가 만일 그보다 5년 전에 대선에 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회창 씨가 자기 아들 병역문제 때문에 치명타를 입었던 그 대선 말입니다. 이명박 씨는 이회창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통령 후보로서 윤리적 흠결이 많았죠. 그 중 하나가BBK인데 대선 직전에 그게 자기 회사임을 인정하는 동영상이 유포되었습니다. BBK가 이명박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별 타격을 받지 않았죠. 5년 전이었다면 후보 시절에 낙마하고도 남았을 텐데 대체 왜일까요?
사람들이 변한 거죠. 사람들에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 거죠. 거짓말쟁이에 도둑놈이라 해도 사장 노릇만 잘하면 대통령감이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던 겁니다. 불과 5년 사이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를 보면 신자유주의 자본화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쳤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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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명박을 찍지 않았다. 반이명박이다 말하는 사람들은 다른가? 촛불, 대운하, 4대강, 미디어악법, 세종시 문제 등에서 이명박을 욕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과연 다른가? 사람이 자기 삶에, 자기 이해관계에 직접 관련되지 않은 문제엔 얼마든 훌륭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면 삶에 직접 관련된 문제를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그런 가장 보편적인 문제라 할 교육문제를 살펴보면, 반이명박을 외치는 사람들이 이명박 진영의 사람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교육문제의 공식적인 견해나 성명서나 토론 같은 것 말고 제 아이 교육문제에서 모습을 살펴보면 말입니다.
저는 박정희 시절에 초중고를 다 다녔습니다. 교사들은 폭력적이었고 학교는 병영 같았죠. 제가 초등학교 1학년 겨울엔가 국민교육헌장이란 게 나왔고 한때는 교사와 아이들이 서로 거수경례를 했던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방과 후엔 군사파시즘은 아이들과 별 무관했죠. 당시에 오후 3시에 소재가 분명히 파악되는 아이는 아픈 아이와 벌 받는 아이뿐이었습니다. 나머진 어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잡으러다닐 때까지’ 놀았죠. 아이들의 사회적 임무가 뭡니까? 노는 겁니다. 제대로 놀아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시민으로 자라고, 그래야만 그 사회에 미래가 생기는 거죠. 그런데 지금 우리 아이들이 오후 3시에 한 시간 가량 소재 파악이 안 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사고상황이 됩니다. 그만큼 아이의 오후 일정이 빈틈없이 짜여 있다는 것이지요.
세계화니 글로벌경쟁 시대니 해서 온세상이 다 이런 줄 알지만 초등연령대 아이들이 오후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국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얼마나 괴상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지금 한국에서 보수적인 부모와 진보적인 부모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보수적인 부모는 당당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고 진보적인 부모는 ‘매우 불편한 얼굴로’ 아이를 경쟁에 몰아넣는 겁니다. 똑같은 짓은 하면서도, 나는 이게 좋아서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끊임없이 드러내는 겁니다. 나는 진보적인 사람이고 이명박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말입니다. 정말 엄청난 차이지요?
이명박 씨가 처음 취임해서 0교시니 우열반이니 영어몰입교육이니 일제고사니 하는 것들을 공식화하겠다고 하자 진보개혁 진영에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명박이 우리 아이들 다 죽인다!” 저는 한편으로 참 다행스러웠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 순진해서 그렇지, 만일 아이들이 프랑스나 독일 수준의 사회 교육만 받았더라면 당장 들고일어났을 테니까요. 이렇게 외쳤겠지요. “개소리 마. 우리는 이미 당신들 손에 의해 죽어간 지 오래야!” 이 살인적인 경쟁과 시장주의 교육은 이명박이 아니라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을 비판히면서도 내 아이의 시장 경쟁력은 알뜰하게 챙기는 우리에 의해 유지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집단이든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반대한다는 건 그 둘이 다르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다르지 않은데 싸우는 걸 우리는 반대한다고 하지 않고 단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론 당사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죠. 싸우는 명분을 가지고 싶어하니까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걸 부각하려 노력하겠죠. 우리와 이명박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명박을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집회나 토론이나 성명서 따위가 아니라 삶의 실제적인 부분에서 살펴보면, 이명박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이명박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명박을 반대한다면 아이들을 이명박과는 다르게 키워야 할 텐데 다른 건 표정 뿐입니다. 이명박의 잘 산다 행복하다는 가치기준과 우리의 가치기준이 달라야 할 텐데 다르지 않습니다. 이명박뿐인가요? 우리는 이건희 씨를 악덕한 자본가라고 욕하지만 이건희 씨와 이건희 씨를 욕하는 우리가 분명히 다른 건 하나뿐입니다. 이건희 씨는 돈이 많고 이건희 씨를 욕하는 사람들은 돈이 없다는 것 뿐입니다. 인생의 가치 기준에서, 자기 자식의 인생에 대한 계획과 소망에서 우리는 이건희 씨와 분명히 다른 게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건 사람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지는 법입니다. 진보적인 인텔리들은 그걸 부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박정희 군사파시즘에 신음하던 국민들” 같은 말인데 그게 다 거짓말입니다. 제가 그 시절에 초중고 다녔지만 신음하던 아저씨 아줌마들 못 봤습니다. 신음한 사람들은 잡혀가거나 죽임 당했죠. 대개의 '국민들'은 다들 제 식구 알뜰하게 챙기며 살았죠. 그들이 잡혀가거나 죽임 당한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라도 응원한 것도 아닙니다. “정치란 게 완벽할 수 있나." "아직 철이 없어서 저래.” “북괴와 대치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무슨.” 이렇게 비웃었죠. 그리고 그 대부분의 국민들은 작은 박정희였습니다. 하급자와 여자와 아이들에게 권위주의적이거나 폭력적인 작은 박정희 말입니다. 박정희 군사 파시즘은 박정희의 쿠테타로 시작되었지만, 바로 그 작은 박정희들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그 작은 박정희들이 그래도 조금씩 의식이 변해서 민주주의를 깨닫게 되고 적어도 군사 파시즘은 수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포악하던 철옹성 같은 군사파시즘은 참으로 무력하게도 무너져 내렸다는 걸 우리는 기억합니다. 6월항쟁이 군사 파시즘을 무너트린 게 아니라 사람들의 변화가 6월항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대통령 이명박’은 반이명박을 외치는 우리를 포함한 오늘 한국인들의 순정한 반영이라는 걸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이명박이 ‘순진하고 건강한 국민들을 침략해서 괴롭히는 악한’이라는 식의 온갖 수사들은 "군사 파시즘에 신음하던 국민들"이라는 말처럼 거짓말입니다. 그런 말들은 마치 대중을 존중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대중을 구슬러 자기 의도대로 줄세우고 끌고가려는 인텔리들의 욕망이 담긴 말입니다.
오늘 그 인텔리들은 마치 이명박 때문에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사람들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들은 오히려 이명박 덕에 매우 편안해졌습니다. 김대중이나 노무현 정권 때는 개혁세력도 서민대중의 편은 아니라느니 신자유주의라느니 하는 비판들이 있어서, 한나라당이나 조중동 같은 수구세력을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체 하기에 불편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정말 편해졌죠. 이명박만 욕하면 충분히 진보적이고 정의롭고 인간적일 수 있으니까요. 이명박은 그들의 원수가 아니라 그들의 허물을 덮는, 그들의 자의식을 사면해주는 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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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우리 안의 이명박'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게 촛불시위 즈음부터였습니다. 이명박 씨를 ‘쥐’라고 부를 정도로 열띤 분위기에서 제 이야기가 마땅치 않게 여겨지거나 묻히는 건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이야기가 이 포럼에서 '우리 밖의 이명박'이라고 표현한 사회 구조나 제도와의 싸움을 도외시한, 시급한 반이명박 싸움의 전선을 흐트러트리는, 내면 문제에 집착하는 어떤 윤리 선언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오해라는 걸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안의 이명박'이라는 말엔 반이명박 싸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의 이명박'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누구이겠습니까. 당연히 이명박을 반대하고 싸우는 사람들이죠. '우리 안의 이명박'이라는 말은 이미 이명박을 반대하고 싸우는 걸 전제하는 것이지요. 우리 안의 이명박이라는 말은 우리 밖의 이명박과 싸우지 말고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자는 말이 아니라 우리 밖의 이명박과 진짜 제대로 싸우자는 말입니다.
싸우려면 당연히 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명박과 싸우는 건 단지 이명박이라는 개인이나 그 패거리에게 앙갚음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와 그 패거리로 대변되는 정치적 실체를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에서 몰아내려는 것입니다. 그 정치적 실체는 바로 ‘극단적인 자본의 체제’입니다. 자본과 지배계급을 위한 세상, 극소수 부자의 이익을 위해 돌아가는 세상, 이미 노동자의 58%가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이고 끊임없이 양극화하고 비인간화하는 세상 말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새해 덕담으로 주고받고 아이들은 신형 휴대폰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 돈귀신에 든 세상 말입니다.
그런데 이 극단적인 자본의 체제는 이명박이 발명하거나 시작했습니까?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자본화의 광풍은 IMF 와 함께 집권한 김대중 정권에서 시작되어 노무현 정권을 걸쳐 이명박 정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한국 경제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김대중 정권에서 기초를 마치고 노무현 정권에서 거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용산 참사 때 돌아가신 다섯 분의 장례가 있었는데, 그 용산 4구역 개발이라는 것도 2006년 노무현 정권에 시작된 것입니다. 다섯 분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용산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요?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적어도 언론 표현 집회 등 절차 민주주의를 추구했고 이명박 정권은 그런 것조차 무시하는 참으로 무지스런 정권이지요.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차이가 오늘 반이명박을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두 분이 연이어 돌아가시면서 그런 정서는 더욱 많이 확산되었지요. 저는 그 차이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종종 그런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 차이가 두 정권 역시 신자유주의 자본화의 길로 매진했다는 사실을 덮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노무현 정권이 수구세력과 진보세력의 사이에 끼어 제대로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고도 합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하 노대통령) 본인도 그렇게 토로했지요. 그런 심정마저 부인하려는 건 아닙니다. 당연히 나름의 고민이 있었겠지요. 노무현은 인간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었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지금 노무현이라는 개인과의 연애사를 말하려는 게 아니라 정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노무현 정권이 누가 보기에도 정말 최선을 다해 서민대중의 편에 섰다면, 그런데 자본과 지배계급에 의해 그 뜻이 자꾸만 밀렸다면 당연히 진보세력은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고 연대했을 것입니다. 강준만 선생이 시작한 안티조선 운동에 당연히 진보세력이 연대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갈등은 언론이나 현실 정치권의 문제 같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관련한 부분에서만 있었습니다. 정작 본질적인 부분, 즉 사회경제적인 부분에선 외국학자들의 표현을 빌면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신자유주의 자본화의 모범생의 길로 매진” 했습니다. 이건 저의 편향된 주장이 아니라 노대통령 스스로 인정한 일입니다. 그는 2005년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실제적인 차이는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서로 갈등하고 원수처럼 이르렁거리는 부분들은 국정운영의 본질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또 자신의 정책이 ‘좌파 신자유주의’ 노선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참 솔직한 분이었습니다.
노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을 추모하고 그와 이명박 씨의 차이를 되새기며 그를 기리는 일은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추모가 지나친 감상으로 흘러 그의 정치와 그 정권에 대한 무작정한 미화로 이어지는 것은 올바른 추모의 태도는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가족 비리로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때 그와 이명박 정권의 분명한 차이조차 무시하고 손가락질하던 감정적인 태도와 똑같이 닮았습니다. 우리는 노무현을 추모하면서 그의 정치를 사실 그대로 기억해야 하고, 서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23명의 열사들도 함께 추모해야 합니다.
오늘 반이명박 세력의 대부분은 바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세력입니다. 그들이 신자유주의 자본화로 일관하여 우리를 힘들게 만들었으니 다시는 정치 활동을 못하도록 연좌제를 적용하자거나 저주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그들이 한 일에 대해서 인정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리도 욕하는 이명박 정권을 누가 낳았습니까? 바로 그들입니다. 서민대중의 편에 설 거라는 인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삼성공화국'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자본의 편에 섰던 그들입니다. 노동 진영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정규악법과 반노동자적인 정책을 밀어붙여 고통과 낙심에 찬 대중들이 '민주주의고 개혁이고 다 필요없고 먹고사는 문제나 해결하자'며 이명박으로 몰려가게 한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사실에 대한 인정이나 반성도 없이 마치 민주주의의 수호자인양 행세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이 ‘그래도 이명박보다는 나았다’는 걸 내세울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바보들이거나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파렴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민주세력’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재집권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꾼들일 뿐입니다. '우리 안의 이명박'은 바로 그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주도하고 있는 반이명박 진영의 실체를 반추함으로써 이 싸움이 그 파렴치한 정치꾼들의 정략에 이용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반이명박 연대야 우리 중에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이명박을 물리치는 싸움이야 너나할 것 없이 연대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런 연대에 앞서 짚어야 할 문제는 연대의 목적이 뭔가 하는 것입니다. 이명박이 절차적 민주주의 마저 무시하려 드는 이유가 뭘까요? 이명박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쾌감을 얻으려는 변태인가요? 김대중 노무현 정권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자본의 편에 서려는 것입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무시해가며 자본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반이명박 연대의 목적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니라 자본화 체제와의 싸움이어야 합니다.
반이명박 연대를 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명박 이후에 대한 전망이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이명박을 물리쳤다 그럼 그 후는 뭐냐, 김대중 노무현 정권으로 돌아가는 거냐. 무지스런 자본화 세상에서 덜 무지스런 자본화 세상으로 돌아가는 거냐. 그건 아니라는 겁니다. 반이명박 싸움은 이명박은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체험과 한계를 넘어서는 전망을 가져야 합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세력이 우리에게 ‘민주세력 연대’를 요구하려면, 먼저 그들이 한 일에 대한 인정과 반성이 있어야 하고, 과거 자신들의 정치를 넘어서는 전망을 제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재집권 노력에 봉사하는 하수인이나 꼭두각시가 아니라면 그걸 요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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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명박 진영의 실체는 반이명박 진영의 개체들, 즉 우리 자신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짐짓 불편한 얼굴로 ‘그래도 현실이 어쩔 수 없지’라 말하며 신자유주의 자본화에 매진했던 반이명박 진영의 모습은 바로 ‘그래도 현실이 어쩔 수 없지’라 되내며 아이들을 시장경쟁에 몰아넣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둘은 하나입니다.
촛불광장에서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시절을 감옥의 수인들처럼 보내는 우리 아이들의 참혹한 현실을 반성했습니까? 촛불을 들고 소리높여 쥐박이를 욕하다 자정께 되어 휴대폰으로 아이가 학원에 다녀왔는지 확인하는 모습이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한 건가요? 우리는 오로지 ‘우리보다 더한’ 이명박의 교육정책만 욕했을 뿐입니다. 아쉽게도 촛불은 그랬습니다. 그 거대한 촛불의 열기가 참으로 믿기지 않을 만큼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건 바로 그래서입니다.
우리는 마치 이명박 정권이, 이명박이 만들어낸 사회제도 때문에 우리 삶과 우리 아이들의 교육이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명박이 우리의 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파괴하고 있다고,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다 죽인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와 우리의 교육관의 순정한 반영으로 이명박이 이명박의 교육정책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이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 앞에서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러고도 우리가 어른이고 부모고 선생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거짓과 기만 속에서 우리가 제 아무리 반이명박을 외쳐도 이명박 정권의 털끝이나 흔들리겠습니까?
요즘 세종시 문제로 난리가 아닙니다. 야당과 반이명박 진영은 이명박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소리지르는데, 글쎄요 애초에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구호의 정체가 뭡니까? ‘지역 균형 부동산 투기’ 아닙니까? 좌우도 위아래도 없는 돈을 둘러싼 아귀다툼입니다. 다들 돈귀신에 들려 있는데 돈귀신의 괴수 이명박이 왜 겁을 내겠습니까? 이명박은 내 밖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존재합니다. ‘우리 안의 이명박’은 이명박과 싸우지 말자는 게 아니라 진짜 싸우자는 것입니다. 싸우는 시늉 말고, 싸운다 착각 말고, 진짜 제대로 싸우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캄캄한 현실을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이런 제 이야기가 맞는 말인 건 같은데 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이른바 ‘비판적 지지’라는 게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데 그게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 이유 또한 ‘현실적’이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현실적이라 느끼는 것’과 실제 현실은 언제나 일치하나요? 지난 대통령 선거야말로 ‘현실적인 선택’의 가장 극단이었지 않습니까. ‘개혁이고 민주주의고 다 필요없고 먹고사는 문제나 잘 해결할 수 있는 대통령을 뽑자’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했는데 결과는 가장 비현실적이었지요. 그런 모습을 보며 우리는 많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 ‘현실적’인 선택이 실제로 얼마나 비현실적인 것인지 뻔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무현에 실망해서 이명박을 선택하는 일에 비해, 이명박을 빠져나가기 위해 노무현으로 돌아가는 일은 과연 현실적인가요?
이런 가정을 해보죠. 우리가 노무현의 정치에 대한 실망을 노무현의 ‘개혁의지 쇠퇴’나 무능력 혹은 수구세력의 저항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노무현에 대한 우리 자신의 ‘비합리적 기대’(자유주의 정권에 좌파정치를 기대한)에서 기인한 것임을 정직하게 성찰하고, 문국현 비판적 지지 따위 솔깃하지 않고, 이제라도 서민대중의 편에 서는 진짜 진보정치를 해보자는 ‘비현실적’인 길을 선택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현실은 지금과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현실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은 ‘아직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비현실적이라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진정 현실적인 것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들 가운데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저는 지금 우리가, 한국의 대부분의 서민 대중들이 공황상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공포에 의한 공황상태 말입니다. 이 공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97년 IMF 사태 때입니다. 넥타이를 매고 출근한 사람이 산으로 오르고 땀흘려 사업을 일구던 사람이 노숙자로 전락하던 풍경을 보면서, 내가 생존의 위기에 빠지면 사회도 국가도 구해주지 않는다는 걸 생생하게 보면서 한국인들은 생존 공포에 빠졌습니다. 공포는 ‘내 새끼의 생존’에서 더욱 극단화되어 너나할 것없이 교육경쟁에 올인하면서 공황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치 재난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처럼 말입니다.
재난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을 보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공황상태에 빠지지요. 합리적인 사고능력을 잃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 내 새끼를 살리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합니다. 심리학에서 그걸 ‘추종행동’이라고 하는데 그저 남들이 많이 가는 대로 따라가다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됩니다. 할리우드 재난영화에선 초인적인 영웅이 사람들을 구원하지만 이 재난영화 같은 현실에는 그런 영웅은 없지요. 우리가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함께 힘을 모아서 이 현실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출구가 어디인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출구까지 가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은 곳으로라도 가자는 사람들을 따라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공멸뿐입니다.
우리가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더라도 함께 힘을 모아 출구를 향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사악한 세상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앞서 저는 군사 파시즘은 박정희가 아니라 작은 박정희들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작은 박정희들이 그래도 조금씩 의식이 변해서 민주주의를 깨닫게 되고 적어도 군사 파시즘은 수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 포악하던 철옹성 같은 군사파시즘은 참으로 무력하게도 무너져 내렸다고 했습니다. 이 사악한 자본의 체제도 그렇게 무너져내릴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이명박과의 싸움을 시작할 때, 우리 아이들을 이명박과 다르게 키우기 시작할 때, 우리의 행복이 이명박의 행복과 달라질 때, 그래서 이 돈귀신의 체제가 강요하는 온갖 부질없는 삶의 규율들에 더 이상 순종하지 않을 때, 내 스스로 작은 이명박임을 성찰하고 다르게 살기 시작할 때, 이 사악한 자본의 체제는 거짓말처럼 무력하게 무너져내릴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밝고 건강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한겨레시민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