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까!(호6:1-3; 요17:1-5 - 김영주 장로)

본문

호세아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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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Come, let us return to the LORD; for he has torn, that he may heal us; he has stricken, and he will bind us up. After two days he will revive us; on the third day he will raise us up, that we may live before him. Let us know, let us press on to know the LORD; his going forth is sure as the dawn; he will come to us as the showers,

as the spring rains that water the earth."

 

요한복음17: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When Jesus had spoken these words, he lifted up his eyes to heaven and said, "Father, the hour has come; glorify thy Son that the Son may glorify thee, since thou hast given him power over all flesh, to give eternal life to all whom thou hast given him. And this is eternal life, that they know thee the only true God, and Jesus Christ whom thou hast sent. I glorified thee on earth, having accomplished the work which thou gavest me to do; and now, Father, glorify thou me in thy own presence with the glory which I had with thee before the world was made.

 

 

 

 

 

설교 본문 :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까!(호6:1-3; 요17:1-5)

 

지난 6 30일 낮에 박아론 교수님한테 전화를 받았습니다.  박소영 목사님의 어머님이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이어 이번 주 설교를 부탁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슬퍼서 펑펑 우실 박 목사님의 모습이 떠올랐고, 또 어느 때라도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는 저의 아프신 어머님 생각이 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날 죽음이라는 단어는 종일 제 마음에 머무르며 제가 처해 있는 현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7년에 걸친 신학교를 드디어 졸업한 한 달 뒤 2009 6월에 제 어머니는 뇌졸증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그 병으로 어머니는 말도 못하시고, 거동도 못하시고, 치매도 걸리

셔서 정신도 없으십니다. 밤에는 악몽 속에서 어머니에게 나타나는 까만 옷 입었다는

죽음의 사자를 피해 도망 다니시느라잠도 잘 못 주무십니다. 그 어떤 풍파에도 꼿꼿이 서계셨던 강한 어머니는 이제 모든 면에서 남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아주 연약한 분이 되셨습니다.  평생 어머니의 헌신적인 수발을 받으셨던 건강하셨던 아버지는 이런 새로운 현실을 감당하시기가 힘드신지 백발의 노인으로 변하셨습니다. 평생 마음 고생 하셨던 어머니가 이대로 돌아가시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온 가족이 어머니 살리기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어머니에게 그리 살가운 딸이 아니었던 저는 죄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자식의 의무감 때문인지, 아니면 새로운 소명의식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 때부터 서울을 자주 드나들며 그런 어머니, 아버지를 살릴려고 애를 썼습니다. 다행히도 어머니의 생명은 연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울을 갈 때마다 점점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죽기 무서워 사시는 우리 부모님, 더 이상 삶의 질이나 가치, 또 인간의 위엄 그런 것과는 아주 거리가 먼 그 분들의 삶을 지켜 보면서 생명보다는 죽음이란 단어가  더 실질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머니가 그 연장된 생명으로 하루 하루를 죽음의 그림자와 싸우며 사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어떻게 죽는 것이 과연 아름다운가에 대해 고민했고 그리고 내게 다가 올 죽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돌이켜 보니 교회나 신학교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해서는 많이 배웠지만 어떻게 죽어야 하나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할수록 슬프고 불안한 마음만 생겨 제 믿음에 대한 회의도 일어났습니다.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생각의 캄캄한 미로에서 헤매고 있을 때, 문득 한 빛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17장 예수의 고별 기도가 생각난 것입니다.

 

17장의 기도는 죽음을 바로 앞 둔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마지막 기도입니다.  자신들이 따르는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고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떨며 움츠러든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린 절절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제자들이 바로 저이었습니다. 저도 그 제자들처럼 내가 의지하며 따랐던 부모님과 나의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움츠려지고 찌그러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배경으로 짙게 깔려있는 17장을 읽다 보니 죽음이라는 말도, 어떻게 죽어야 하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영원한 삶 eternal life에 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1절은 예수의 때가 왔음을,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의 영광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4, 5절은 다시 예수 사역의 완성과 하나님과 예수의 영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샌드위치 같은 형식이라서 1절과 4,5절은 빵이고, 그 중간 2, 3절은 고기와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광고 Where is the beef? 에서 꼬집어 말한 중요한 beef 2,3절이며 그 중에서도 핵심은 영원한 생명, 영생이란 단어입니다.  영생이란 단어는 히브리어 성서에는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생소한 단어입니다. 희랍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life age during, life ever living으로 죽지 않는 삶이 아니라 지금 세대에 계속되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생이란 단어가 요한 복음에서 처음으로 그 유명한 3 16절에서 나옵니다.

 

거듭 나라는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또 영생이란 생소한 언어를 주며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희랍어 문법으로 보면 조건 부속절이라 지금 네가 영생은 없지만, 네가 나를 믿으면 영생을 가진다 라는 뜻으로 믿음이란 영생의 조건과 영생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런 새로운 언어들을 소개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은 이 땅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 이 새로운 나라에 필요한 새로운 가치와 방식을 거듭 태어남, 믿음, 영생이란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생은 현재에 가능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17장으로 돌아갑니다. 마지막 유언 같은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생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3, “영원한 생명은 이것이니 곧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앎의 대상이 하나님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도 알라고 되어있는데 평소와는 달리 예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또한 영생과 붙어다니는 have라는 동사 대신에 know 라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저자의 의도가 궁금해졌습니다.

 

  그 스도라는 말은 메시야,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대개 왕, 제사장, 예언자들을 가르킵니다. 그런데 20세기 유명한 신학자 틸리히는 여기에 새로운 해석을 내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새로운 존재, New Being 으로 해석하며 예수님을 새로운 존재의 상을 구현하신 분이라고 말했습니. 그리고 더 나가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도 예수님처럼 새로운 존재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사실 요한 복음의 예수님은 자신을 길, 진리, 생명으로 말하며 틸리히의 말대로 새로운 개념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자는 예수님이 예전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임을 강조하며 예수님이 말씀으로, 삶으로 보여주신 새로운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이 보내신 새로운 존재의 구현인 예수님도 알라고 말하는 듯 싶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아야 하겠습니까?  안다라는 희랍어, ginwsxw에는 Know, come to know, understand, perceive, have acquaintance라는 여러 뜻이 있는데 현재형이니 계속적으로 알아가고, 계속 지식/친분을 쌓아 가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계속 지식/친분을 쌓아가라고 하는 것인가 생각하다가, 안다의 히브리어를 보았더니 재미있는 단어, yada가 나왔습니다. Yada는 안다, 이해하다 라는 뜻 이외에, 속속들이 안다 라는 뜻이 있는데, 이 속속들이 라는 말은 마치 남녀가 동침을 통하여 서로를 친밀하게 아는 intimate experience의 앎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결혼 전에 서로가 안다고 여겼던 앎이 결혼이란 intimate experience통해 서로의 참 모습을 알게 되고,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는 것처럼, 영생은 우리가 알았다고 여겼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 새로이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 그 앎이 행동으로, 삶으로 힘있게 피어나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어 둘이 하나가 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인간이 예수의 정신으로 자라며 점점 성장하여 새로운 존재가 진화되어가는 현재 진행중인 역동적인 삶이 영생인 것입니다. Spong 감독도 그의 마

    지막 책인 eternal life에서 영생은 life at one with God라고 하며 앎, 깨달음을 통해 내 안에 있는 참 나인 하나님을 발견하여 내 의식이 universal consciousness, God’s consciousness로 진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런데 그 영생은 특정한 장소가 아닌 바로 우리 일상의 삶에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호세아서는 하나님을 알면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도 17장에서 제자들에게 그들의 일상 터전에서 영생을 살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17장을 읽던 그날, 저는 어떻게 죽느냐의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이며 그런 삶의 결과라는 것을, 그리고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야겠다는 것을, 그리고 잘 산다는 것이 영생을 사는 것임을, 그리고 오늘 바로 영생을 살아야 한다 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삶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생긴 것입니다.  다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제자들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게 새로운 언어인 영생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논지는 이와 같습니다. 첫째, 영생은 깨달음과 믿음이 요구되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둘째, 영생은 예수의 정신을 마음에 담아두고 늘 생각하여 하나님과 아주 친밀해지는 성숙한 삶입니다. 셋째, 영생은 우리를 성화시켜 예수님 같은 새로운 존재로 이끄는 역동적인 힘입니다. 넷째, 영생은 바로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는 소명 의식입니다.

 

저는 이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제 어머니처럼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죽음이 제게 다가 오면 몇 년 전 돌아가신 제 시아버님처럼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죽고 싶습니다. 죽음이 오는 마지막 순간에 두 팔을 들어 올리시더니 다시 내려 놓으시고는 숨을 멈추신 아버님의 마지막 얼굴은 참으로 평온 그 자체였습니다. 일생동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힘쓰며, 그 앎과 깨달음을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힘쓰셨던 아버님은 그 안에 가득찬 영생으로 죽음을 스스로 건너가셨습니다. 저도 그와 같은 죽음을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실 겁니까?  아니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이제는 여러분이 생각하며 결단할 차례입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시인 구상 선생님이 쓰신 오늘 이라는 시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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